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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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굴하지 않은 자, 인생2막에 꿈을 이루다 - 김동필 대표이사


나이에 굴하지 않은 자, 인생2막에 꿈을 이루다

㈜넥스팜코리아 김동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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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팜코리아의 김동필 대표와 그의 가족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 격언부터 떠올릴지 모른다. ‘자식이 효도하면 어버이가 즐겁고, 집안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 『명심보감』의 「치가(治家)」편에 나오는가화만사성이다. 따지고 보면, 무녀 독남의 2대 독자이자 22녀의 아버지로, 홀어머니까지 모신 가장으로서 김동필 대표에게 가족은 가장 믿을 만한 구석이었다. 진입장벽이 높기로 소문난 제약업계에서 후발 제약회사의 절대적인 핸디캡을 이겨내고 유명제약업체 영업임원 출신의 유일무이한 제조업 창업과 성공, 결국 그 일련의 과정에도 가족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김 대표에게 가족은 그의 인생2막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가장 든든한 울타리이자 열렬한 지지자이며, 묵묵한 후원자였다.

故 김제세 아버지가 제약업에 들어서게 하다
http://nara.sbc.or.kr/nse_files/upload/2017_11_18sub1.jpg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님을 여읜다는 것은 인생 행로의 급변침이기도 하다. ㈜넥스팜코리아의 김동필 대표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까지 접한 가장 충격적이고 힘든 사건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충북 괴산 출신의 소문난 수재였던 열아홉 살 소년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을 만한 고통스런 시간이기도 했다.
“1960
, 아버지가 마흔일곱 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워낙 강골이시고 건장한 체격이어서 온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는 100세까지 사실 거라고 했는데, 너무 허망했습니다. 사망 원인이 위암이라는데, ‘이란 병명조차 처음 들어봤을 만큼 의학도 발달하지 않았고 양약도 드물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신 겁니다. 나중에 제가 제약회사에 입사한 건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덕에 농사를 지어 가업을 이으라는 집안 어른들의 요청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3 시절, 한창 공부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그는 원하던 서울대를 낙방한다. 대신 성균관대에 입학한 그는 미국에서 들어온 신학문을 접한다. 경영학은 언젠가 기업가가 되어보겠다는 포부를 품고 선택한 운명적 학문이었다. 경영학을 배운 덕분에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하고, 더욱이 다국적 제약회사를 다니면서 놀라운 신약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신약의 효과는 당시 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만큼이나 신비했다.
처음에는 국내 한 제약회사에 입사했고, 그 다음에는 다국적 제약회사에 들어갔죠. 그렇게 제약회사 영업직에 몸담게 되었는데, 신약의 효과를 직접 제 눈으로 보고 알게 되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슴에 더 사무쳤습니다. 그래선지 줄곧 영업을 하면서도 좋은 약을 만들어 환자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놓아버릴 수 없었습니다.”

정직과 분수를 지키라는 아내 송신자가 곁을 지키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때는 쉽사리 오지 않았고, 평생의 소원이던 제약회사 창업은 더디기만 했다. 1973년 다국적 제약회사에 입사한 뒤 22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그 때가 찾아왔다. 1995, 영업 총괄책임자 상무이사로 55세 정년을 꽉 채운 뒤였다. 넉넉한 노후가 보장될 만큼 적잖은 퇴직금도 받았다. 당시 1억 원이 넘는 돈을 받았으니 일곱 식구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김 대표는 제약회사 영업임원 출신으로서 그 누구도 택하지 않았던, 전례 없는 도전에 나섰다. 전공분야인 유통이 아닌 제조업 창업이었다. 주변에서는 안락한 노후 대신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며 질책이 쏟아졌지만, 인생2막을 제약분야 제조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김 대표는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그때는 어머님도 살아 계셨고, 제가 가장으로 일곱 식구를 책임지던 때였습니다. 큰아들이 약학대학원에 다니던 시기이니, 아이들 결혼도 시키지 않은 상황이었고요. 그래도 제 평생의 꿈인 제약회사 제조업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에게 매달 120만 원의 생활비를 약속하고 폭탄선언이나 다를 바 없는 창업을 통보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아내로부터 격렬한 반대가 나올 만했다. 하지만 김 대표의 아내, 송신자 여사는 달랐다. 사실 2대 독자였던 김 대표 부부에게 가족의 의미는 남달랐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그 시기에 대세를 거슬러 2 2녀를 둘 수 있었던 것도 무녀 독남 2대 독자였던 김 대표의 바람을 묵묵히 따라준 아내 덕분이었다. 송 여사는 아내로, 며느리로, 22녀의 어머니로, 또 사업가의 내조자로 묵묵히 제 역할을 해냈다.
아내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내는 평생을 가정주부로 네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모두 대학까지 교육시키고, 각자 제 길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런 아내는 제가 사업을 하는 동안에도 늘 정직하게, 욕심 내지 말고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하라고 주지시켜 주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오는 동안 저에게 제일 큰 도움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아내부터 생각나는 건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묵묵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넥스팜코리아의 사업은 창업과 동시에 위기를 맞았다. 장장 2년의 투자 끝에 까다로운 각종 인·허가를 통과하며 마침내 적정 제조 규범을 준수하는 GMP인증 공장을 완공했지만, 그것이 또한 불운의 시작이었다. IMF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환율 상승으로 당시 3배나 오른 원료 수입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완공된 공장은 가동조차 하지 못한 채 3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사업을 해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판이었다.
그 무렵, 김 대표가 찾은 해결책이 넥스팜코리아의 첫 번째 제품, 타스나 생산이었다. 당시 타스나는 1개당 5원짜리 약국조제용 소화제(제산제)였다. 그때까지 타스나 같은 약품은 큰 병원에선 직접 조제했고, 약국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가의 제품을 구매해 사용했다. 게다가 제약회사들은 인건비와 수지타산 문제로 타스나 같은 저가 소화제는 생산품목에서 아예 제외했다. 타스나는 당시 넥스팜코리아 형편에 딱 맞는 틈새상품이었다. 타스나를 생산하면 가동조차 하지 못한 공장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소 규모의 생산인력만으로도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예상은 적중했고,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타스나 매출은 첫 달에 300만 원, 둘째 달에 500만 원을 찍더니, 곧이어 월 7,000만 원까지 치솟았다. 그렇게 창업 3년 차였던 넥스팜코리아는 타스나로 마침내 시장점유율 1위의 제품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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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 넥스팜코리아 22가 꽃피우기를 바란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창업 6년 차에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2000, 의약분업은 김 대표에게 또 한번의 엄청난 시련을 안겼다. 의사 처방 없는 약국 조제가 금지되면서 이전까지 월 매출 1억 원에 육박하던 매출이 600만 원 남짓으로 급감했다. 김 대표는 부랴부랴 의사들이 처방하는 오리지널 제품과 약효가 동등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약효동등성 실험에 나섰다. 하지만 인력과 더불어 막대한 자금을 투여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실험은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빠르게 약효동등성 인허가를 내줬지만, 신생 제약회사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자칫 실험이 늦어져 등재가 한두 달 늦춰지면 제품 가격은 어느새 30~40%씩 내려가버리니, 시장경쟁력에서 밀리게 됩니다. 그러다 약효동등성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이하 생동성 실험)도 하라는 정부의 요구가 떨어졌는데, 그때 노후를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뒀던 경기도 안성 땅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김 대표에게는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살고 있던 아파트는 물론이고 마지막 남은 노후자금까지 탈탈 털어 마련한 10억 원을 복제약(제네릭) 품목 10개에 대한 판매허가를 받기 위한 생동성 실험에 투입했다. 특히 2억 원이나 들인 고혈압약 실험이 실패로 끝났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다행히도 나머지 약들이 실험에 통과하면서 김 대표는 기사회생했다. 2002년 매출 20억 원을 시작으로 넥스팜코리아의 매출은 매년 2배 이상씩 상승하며, 현재 연매출 400억 원대의 탄탄한 중견 제약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생동성 실험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늘 생사를 오가던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이왕 시작한 일, 끝을 보자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 정년퇴임 뒤에 시작한 사업가의 길이었기에, 포기하는 순간 비참한 노후만 남는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더, 내 세대보다는 다음 세대에 제약회사로 꽃을 피우도록 씨를 잘 뿌려놓고 싶은 열망이 컸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창업 당시서구제약이란 이름을 쓰다가 이듬해에 넥스팜코리아로 사명을 변경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비록 뒤늦게 창업한 김 대표 본인 세대에서 다 이루지 못할지라도, 다음 세대에서는 제약회사로 꽃을 피우는 리딩 컴퍼니가 되라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었다. 다음 세대를 일컫는넥스트(next)’와 제약을 뜻하는 ‘pharmacy’에서 ‘pharm’을 땄다. 우리나라 제약업계에 좋은 씨를 뿌리고 잘 자라서 다음 세대에 꽃을 피우라는 뜻을 사명에 담은 것이다. 이는 김 대표의 궁극의 꿈인 신약개발과도 맞닿아 있었다. 제약회사의 원천기술인 신약개발은 한번 시작하면 20~25년이 걸리는 제약회사의 꽃 중의 꽃에 해당하는 업무다.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바쳐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는 일이지만, 김 대표는 회사 이름에 걸맞는 미래를 위해 과감히 투자를 결정하고 2012년 이래 충북 오송의 생명과학단지 내 공장시대를 열었다.
특히 자식 4남매를 제약회사에 꼭 맞는 전문인력으로 키우는데도 성공해, 그의 세대에 다 이루지 못한 꿈을 그의 자식 세대가 이룰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겼다. 실제로 김 대표는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 의과대학 약리학 교수인 첫째아들과 약사 출신의 첫째 며느리, 둘째 며느리가 준비된 제약전문가로 뒤를 받치고 있다. 경영학을 전공한 둘째아들은 메이저급 J제약회사 출신으로 2세 경영에 뛰어들었다. 이밖에도 회사의 회계 업무를 총괄하는 큰딸과 변호사로 활동 중인 둘째 딸까지 자식 모두가 제약회사에 손색이 없는 전문가로 성장했다. 자신의 세대보다는 다음 세대가 더 기대된다는 김 대표의 이야기가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넥스팜코리아의 준비된 제약인 어벤저스, 22녀 자녀들이 당당하게 대기 중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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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eadership
김동필 대표

http://nara.sbc.or.kr/nse_files/upload/2017_11_18sub4.jpg열정을 다한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그러하다. 창업부터 현재까지 어떤 일을 하든 올인했다. ‘하다가 안 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넥스팜코리아가 그랬고 제품개발이 그러했듯, ‘이건 내가 꼭 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추진했고, 그러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화합에 앞장선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의견이 갈리는 게 세상 이치다. 하지만 회사는 화합을 이루지 못하면 결코 성과를 낼 수 없다. 현재 약 130여 명의 직원이 있다. 화합을 위해 이들 직원 개개인과 거리감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평소에 말투 하나까지도 신경을 쓴다. 화합의 기본이 될 수 있도록 권위적인 모습을 탈피하려고 애쓴다.

비전을 제시한다
회사의 비전뿐만 아니라 개인의 비전도 중요하다. 특히 직원들에게 회사를 떠나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설정하는 자신만의 비전을 가지라고 설파하고 있다. 일단 제약업계에 몸담았다면 자신의 적성분야를 이곳에서 찾아 승부를 걸어야 한다. 완전히 다른 분야로 간다면 성공의 확률이 극히 낮아진다. 때문에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잘하는 일이 있다면 그 길을 자신의 길로 만들고, 비전을 가지고 도전하라고 격려한다.


박은주 전문기자 사진 박명래 객원사진기자

출처 : http://nara.sb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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